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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12. 12:57
한국전쟁을 치른 군 지도부 가운데 백선엽 장군의 경력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다. 해방 후 14년3개월의 군생활 중 대장으로 재직한 기간이 7년4개월이나 된다. 대령 계급장을 달고 북한의 남침에 맞선 그는 고속승진해 1952년 7월 육참총장이 됐고 다음해 1월 30대 중반에 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새로 창설되는 야전군을 지휘하고자 육참총장직을 그만두고 야전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다시 육참총장으로 복귀했다가 연합참모본부 총장을 거쳐 군복을 벗었다. 창군 초기의 혼란상을 고려해도 병영 생활의 절반 이상을 별 넷을 달고 근무한 셈이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전 당시로서는 명문인 사범학교를 나왔다. 한국전쟁이나 게릴라전 전술 등에 대해 그가 쓴 책들은 영어와 일본어로도 번역돼 전문가들 사이에 일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저서 <길고 긴 여름날>에는 국군 장성이 미군 사병을 구타했다가 혼쭐이 나는 대목이 나온다. 54년 9월 야전군 사령관이던 백 장군이 탄 지프를 미군 공병대 트럭이 추월해서 지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차에 동승했던 준장 계급의 인사참모가 분을 삼키지 못하고 쫓아가 트럭을 세운 뒤 지휘봉으로 운전하던 사병을 때렸다. 백 장군은 의외의 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예감이 들어 인사참모를 대동하고 공병대를 찾아가 중대장과 구타당한 사병에게 사과했다. 인사참모에게는 서류상 견책조처를 취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군 사병의 가족이 지역 출신 의원에게 진정을 하고, 그 의원이 미국 정부와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보내는 등 문제가 확대됐다. 유엔군 사령관이 도쿄에서 날아와 8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찾아와 경위 설명을 요구한 것이다.

문제의 뿌리를 찾다 보면 옛 일본군의 야만적 관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조건 상명하복이 절대시되는 풍토에서 구타와 기합은 군인정신을 단련시키는 제도로 굳어졌다. 초창기 국군 지도부에 백 장군을 비롯해 일본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창군사의 숨길 수 없는 한 단면이다. 일본은 패전 후 군대를 해체했다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재무장화 방침에 따라 ‘경찰예비대’라는 기이한 명목으로 군대를 부활했다. 하지만, 옛 일본군이 나라를 나락에 빠뜨린 장본인이라는 경계심이 발동해 권위주의적 병영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역설적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고통을 당한 한국에서 옛 일본군의 나쁜 잔재가 끈질기게 남았다.

군에서 사병이 상급자에게 구타를 당하는 것은 오랜 기간 얘깃거리도 되지 못했다. 국군 대장이 구타문제로 미군 중대장과 사병에게 찾아가 사과를 한 지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입대한 청년이 구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싸늘한 재로 돌아오는 사건이 적지 않았다. 졸지에 사랑하는 아들, 동생, 남편을 잃고서도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요구는커녕 하소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주검은 바로 화장되고,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심약한 이들의 자살사건으로 종결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국민 다수의 무관심 속에서도 그나마 유가족들의 처절한 투쟁 끝에 ‘군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2005년 제정됐다. 진상규명위는 별도의 입법조처가 없으면 올해 말로 3년의 활동시한이 끝나지만, 접수된 사건의 절반도 처리하지 못했다. 과거사 정리를 거론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 희생자가 당신의 아들, 동생, 남편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이제 덮으면 진상은 영원히 어둠에 갇힌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21270.html